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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대천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맑고 깨끗한 물을 이용해 한 때 논농사 지어서 수확된 쌀이 임금님에게 진상이 되었고 사시사철 늘 맑고 깨끗한 강정천과 악근천은 서귀포시민의 식수로 사용하는 젖줄이며 최고의 피서지입니다.
  • 언제라도 한번 찾아오셔서 싱싱한 은어회를 맛보시고 가시길 바랍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우레와 같이 쏟아져 내리는 엉또폭포가 자리를 잡고 있는 대천동은 주민들의 인심 또한 순후하여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할 것입니다.
  • 우리동은 민원인에게 친절하고 신속하며 공정 정확하게 민원 처리를 하겠습니다.

 

강정마을

강정마을

강정마을의 주변에는 강정큰내와 악근내 등 물 좋은 시내가 흐르고, 이런 덕분에 주변에 비옥한 논밭들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일강정'이라고 옛부터 전해오는 자랑을 간직하고 있다. 이 마을 부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강정동 4262번지를 옛부터 속칭<대궐터>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옛날 기와나 대리석 파편들이 발견된다. 또 1653년에 간행된 이원진 편 <탐라지(耽羅誌)>에는 강정천을 대가래천(大加來川), 악근천을 소가래천(小加來川)으로 쓰고 있는데 이곳이 가래현(加來縣)으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시기를 마을 사람들은 1300년 이전부터 680년 전쯤까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기록이나 실증자료는 아직도 발굴이 안된 상태이다. 다만 현재 마을 부근의 무덤들은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9∼12대의 조상들이어서 약 350년 전쯤에 비옥하고 물 좋은 터를 찾아 여기에 정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처음 거주했던 곳은 지금 마을의 동북쪽인 악근내 상류의 소왕물(沼旺水) 동쪽 지경 속칭 <고상머들>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해 이 동네에 천식병이 돌아 현재의 마을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처음 입향한 성씨들은 김(金)씨, 고(高)씨들로 약 360년 전, 또 윤(尹)씨, 강(姜)씨, 조(趙)씨가 300여년, 다음 홍(洪)씨, 이(李)씨들이 250여년 전에 이 마을로 와서 살기 시작했다. 1906년(광무 10년) 제주목이 제주군으로 개편되고 행정구역이 개편될 당시 강정은 대정현(大靜縣) 좌면(左面)소속이었다. 이후 1915년 5월에는 군제가 폐지되고 도제로 개편되었는데 1929년 당시 좌면 강정리의 통계는 353가구에 남자 658명, 여자 720명 등 1,378명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46년 8월 1일 제주도가 도(道)로 승격된 후 강정리는 중문면에 속해 있다가 1981년 7월 1일 서귀읍과 중문면이 통합되면서 서귀포시 강정동이 되었다. 일제시대부터 1950년대 초까지 강정리는 1구인 현 강정동과 2구인 현 용흥동을 포함한 마을이었는데 당시 2구에는 속칭 <내팥>인 천외동, 염둔, 월산동(종복이왓), 기목동(틀남밭), 궁산동(활오름), 엉커리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용흥.염둔.월산마을

이 마을들은 과거 강정2구 였던 마을로 4.3 때 강정리로 소개했다가 진압 후인 1952년 인근의 작은 자연부락들인 천외동, 염둔, 월산동, 기목동, 궁산동, 엉커리 등의 이재민들을 포함, <복용동산> 뒤에 재건하였다. 그 이전, 지금으로부터 360여년 전에 파평윤씨 입도 12대 후손인 시번이 내팥에 거주하기 시작,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918년에는 강정2구가 되었다. 1928년께는 마을 이름을 신흥리(新興里)라 부른 적도 있었다. 설촌 이후 이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북쪽에 천년송(千年松), 남쪽에 만년(萬年)팽나무를 심어 마을을 지켜왔으나 현재는 팽나무만이 남아 있다. 이 마을의동쪽에 위치한 염둔마을도 오랜 마을로 1416년(태종 16년) 대정 관내의 마을이 되었다가 그 후 강정2구에 속하였다. 이 마을에는 1886년에 남평문(南平文)씨가 입향하여 살면서 염돈으로 마을이름을 바꿨었다. 마을 중심에는 운랑천(雲浪泉)이 있어 이 마을의 식수원이 되고 있다. 4.3 이후 용흥(龍興)마을 쪽으로 재건, 이주했으나 최근 다시 과수원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용흥마을에는 인근의 작은 자연부락들인 월산(月山)과 영남동(瀛南洞)쪽 이재민들도 재건당시 포함되어 있다.

 

도순마을

도순마을

도순동 마을은 1402년(태종 2년)에 이천서(利川徐)씨와 전주이(全州李)씨, 고부이(古阜李)씨 등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1416년(태종 16년)에 제주도에 삼현 통치 시기에는 대정현에 속하는 석송리였다. 마을 이름을 석송리라 한 것은 마을 인근에 돌더미와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이 마을에 석송이란 이름의 토호가 살았기 때문에 거기 연유한다는 설 두가지가 있다. 이 마을에도 속칭 <정든모슬(정든슬)>,<고지세> 등의 지명이 있는데 당초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이 여기라는 설이다. 이후 1896년 군제(郡制)가 시행될 당시에는 좌면(左面) 돌송리(乭宋里)(일설에는 독송리(獨宋里))라고 이름을 바꿔 불러오던 중 일제시대에 접어 들어서 현재와 같은 도순리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나이 많은 노인으로 향장, 부향장, 3향장 등 3 위를 마을 행정자문위원으로 추대하는 경로사상이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 서쪽에는 속칭 <쇠테왓>이 있는데 옛날의 우마 방목과 관련된 지명으로 보이며 얼마 전까지도 여기서는 묵은 기왓장들이 나왔었다.

 

월평마을

월평마을

월평마을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반달 형태로 생겼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전해온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 <장동>에 유첨장이라는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설촌이 되었다는데 이 마을 동쪽 강정동과의 경계지점에는 <유첨장물>이라고도 부르고 <이첨장물>이라고도 부르는 샘물이 지금도 있다. 유첨장은 여기 정착하고 이 물을 이용하여 논밭을 개간했기 때문에 이 물 이름이 <유첨장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일 뿐 그 가계를 엮지는 못하고 있다. 그 후 1794년(갑인년)에 고부이씨가 별도로부터 건너와 현재의 월평리 445번지에 정착했으며 그 후 김(金)씨, 고(高)씨, 강(姜)씨 등이 들어와 <초낭골>에서 살았다. 초낭골은 당시 인근에 참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이후 월평리로 이름이 바뀐 것은 1805년 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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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용흥 도순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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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대천동>주민자치
담당자
박희진
연락처
064-760-4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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