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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표선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동남부, 서귀포시 동부지역에 위치한 관광, 교통, 문화, 상업의 중심지인 우리 표선면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옛 정의현의 500여년간 도읍지였던 성읍민속마을! 도내에서 가장 넓은 표선백사장! 옛 조상들의 생활상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제주민속촌박물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시리 유채꽃길 등 청정 관광자원! 전통문화와 관광, 그리고 1차산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1만2천여 면민들이 소박한 꿈을 가꾸어 가는 지역입니다.
모든 분들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민원인에게 친절하고 신속하며 공정·정확하게 민원 처리를 하겠습니다.

 

정의향교, 일관헌, 느티나무, 팽나무, 성읍 조일훈 가옥, 성읍 고평오 가옥, 성읍 이영숙 가옥, 성읍 한봉일 가옥, 성읍 고상은 가옥, 성읍민속마을, 돌하르방, 송종선 가옥

 

유형문화재

  • 정의향교
    • 지정번호 :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5호
    • 지 정 일 : 1971년 8월 26일
    • 지정수량 : 향교 1식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서문로 14
      대부분의 향교 건물이 남쪽을 향하는 것과는 달리 정의향교는 정의읍성의 서문 옆 약간 높은 언덕에 동향으로 위치해 있다. 좁은 골목이 대성문까지 있고, 경내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 수선당, 수호사, 내삼문과 협문(2동) 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전후에 퇴가 있는 전후퇴집으로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앞퇴는 트여 있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다. 기단은 낮고 원뿔 대형의 장주초 위에 민흘림 두리기둥을 굵게 썼다. 구조는 2고주 7량으로 기둥머리에 창방을 얹고 주두를 놓아 화반으로 장혀와 도리를 받고 있다. 당초문이 선각되어 있고 보아지와 화반, 대공은 모두 와선(渦線)무늬로 되어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완만한 물매의 겹처마 합각지붕으로 여느 건물과 비슷하다. 명륜당 역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후좌우 퇴집이다. 전퇴는 개방되어 있고, 바닥은 박석이 깔아져 있는 토방이다. 중앙 3칸은 판청(板廳)이고 좌우익은 온돌과 고방으로 고전적인 간잡이를 하고 있다. 이것은 제주도의 일반주택과 같은 '간살 나누기'인데 다만 부엌이 없고 대청이 3칸인 점만이 다르다. 전퇴는 박석을 완석형으로 깔고 기단은 낮고 원뿔대형 장주초에 민흘림 두리기둥을 쓴 것은 대성전과 비슷하다. 지붕은 합각지붕이나 홑처마로 여러 모로 민가방식과 같이 처리했다. 즉 기둥머리에 퇴보를 맞추고 창방을 직교시켜 사괘 맞춤으로 올리고 창방 위에 도리를 놓은 것을 위시하여 보아지와 대공의 모양까지 매우 간결하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대정향교 고명학(高鳴鶴)의 기문에 의하면, '1423년에 정의현청을 진사리(현 성읍리)로 이설할 때에 향교를 西城(서성) 안에 세웠는데, 관아가 가깝고 여염집이 떠들썩하여 문묘의 자리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1809년에 여철영(呂喆永) 현감이 北城(북성)쪽인 화원동의 조용한 곳으로 옮기려고, 1809년 10월 24일에 착공했으나 객사의 화재로 인하여 도중에 체임되고 후임 노상희(盧尙熙)현감에 의해 다음해 3월 9일에 완공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1738년에는 나억령(羅億齡) 현감이 명륜당과 재실을 건립하였다고 하며, 1849년에는 장인식(張寅植) 방어사(防御使)가 조정에 계청(啓請)하여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정의향교에는 전패(殿牌)가 보관되어 있다. 원래 전패는 지방 각 고을의 객사 안에 모신 '전(殿)'이란 글자가 쓰인 나무패(木牌)이며, 이는 '대전(大殿) 곧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였다. 이는 중국황제를 상징하여 서울에 봉안되어 있었던 궐패(闕牌)를 모방하여 지방에 왕권의 지배를 표방하던 의물(儀物)이었다. 동지, 설명절 및 국왕의 탄일조하(誕日朝賀)와 기타 하례의식이 있을 때, 관원과 신민(臣民)들이 이를 모시고 경배하였다. 전패는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엄격하였다.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에 병합되며 수령은 파면되었다. 이 때문에 수령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 고의로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지방행정에도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어 1663년부터는 고을 혁파법이 폐지되고, 1671년에는 가족연좌법도 폐지되었다. 수령을 파면하는 규칙도 1796년 이후 완화되었다.
  • 일관헌
    • 지정번호 :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7호
    • 지 정 일 : 1975년 3월 12일
    • 지정수량 : 건조물 1동
    • 소 재 지
      표선면 성서문로 10 일관헌은 조선시대 정의현감이 정사를 보던 동헌(東軒)으로 현재의 시청과 같은 건물이다. ‘일관(日觀)’이라 한 것은 『척자(尺子)』에 ‘태산상유삼봉 동일일관 계명시견일출(泰山上有三峰 東日日觀 鷄鳴時見日出)’이라 하여, ‘태산 위에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그중 동쪽의 것을 일관이라 하며, 닭이 울 때 일출을 본다’고 한데서 따온 것이다. 1416년 오식(吳湜) 안무사(按撫使)가 조정에 요청으로 산남지역이 2개 현으로 분리될 때 정의현은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했었다. 그러나 고성리는 왜구침입에 따른 방어상 어려움이 있고, 또 너무 동쪽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서부지역 주민들이 불편이 많아 1423년 정헌(鄭軒) 안무사가 현청을 진사리(현 성읍리)로 옮기게 되었다. 일관헌은 1443년에 현 위치로 옮겨진 후, 여러 차례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면사무소로 사용되었고, 그 뒤에는 리사무소로도 이용되었다. 일제가 일관헌의 높은 기둥과 기단을 잘라버림으로써 전형적인 면모가 훼손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은 조선시대의 건물을 고증하여 1975년에 옛 건물을 헐어내고 새롭게 증축한 것이다. 일관헌은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돌담이 둘러 있고 대문으로 출입한다. 현 건물은 1975년에 개축한 것인데, 기둥을 콘크리트를 사용한 유사한 전통건물로 간잡이도 동헌의 일반형인 5칸이 아닌 4칸이고 측면이 2칸인 19세기 이후 민가의 간잡이를 하고 있다. 다만 두벌대 현무암 기단 위에 합각지붕으로 외형적인 권위를 갖추고 있을 따름이다. 전면퇴는 우물마루로 트여 있고 좌측퇴는 수납과 ‘굴묵’으로 사용한다. 간살이는 가운데 2칸이 판청이며 양측간은 방으로 꾸며져 있다.

 

무형문화재

  • 국가지정 문화재가. 제주민요
    •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95호
    • 지 정 일 : 1989년 12월 24일
    • 지정수량 : 오돌또기, 산천초목, 봉지가, 맷돌노래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정의현로 56번길 7

 

― 봉지가 ―

봉지가는 기녀들에 의해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서 불렸던 창민요로, 일하면서 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봉지가의 ‘봉지’는 ‘꽃봉오리’의 제주도 말로서 자연의 순리를 통해 님에 대한 연정을 노래가사로 표현한 것이다. (현순옥, 강문희)

 

봉지가 진다 봉지가 진다
봄철 낭게서 봉지가 진다
에헤 리히리히리히리 야아야
에헤 리히리히리히리야아야 야-에헤에가 얼씨구나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청포장 속에서 잉어가 논다
에헤리히리히리히리 야아야
에헤 리히리히리히리야아야 야-에헤에가 얼씨구나

 

앞집 사름은 인물이 절색
뒷집이 사름은 과부가 명창
에헤리히리히리히리 야아야
에헤 리히리히리히리야아야 야-에헤에가 얼씨구나

 

진 삼을 밀려나 놓고
흙은 삼은 땡겨나놓아
에헤리히리히리히리 야아야
에헤 리히리히리히리야아야 야-에헤에가 얼씨구나

 

  • 도지정 문화재
    (1) 성읍민속마을 오메기술
    • 지정번호 :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3호
    • 지 정 일 : 1990년 5월 30일
    • 지정수량 : 오메기술 1식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리 673
      성읍민속마을 오메기술은 1990년 5월 30일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전승체계로는 보유자 김을정, 전수장학생 강경순이 있다.
      이 오메기술은 막걸리를 만드는 술떡의 이름인 오메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좁쌀로 오메기떡을 만들어서 그곳에 누룩을 넣고 발효시켜 만든 탁주를 말한다. 제주의 술은 쌀을 기본으로 하는 육지와는 달리 논이 귀하기 때문에 밭농사에서 얻을 수 있는 좁쌀을 가지고 술을 빚어 일상적으로 마셔왔다.
      주조과정은 크게 누룩만들기와 술만들기로 나뉜다. 음력 8월부터 10월까지 보리쌀을 이용하여 누룩을 만들어 발효시킨 다음 잘 말린다. 누룩이 잘 익을 때쯤이 되면 좁쌀을 곱게 갈아 끓는 물을 부어 둥글게 오메기떡을 만들어 삶는다. 삶아진 오메기떡을 식기 전에 으깬 뒤 떡을 삶았던 물을 부어가며 묽은 죽 상태로 만든다. 그 다음 잘 말린 누룩을 성글게 부수어 항아리에 부어두어 7~10일정도 지나게 되면 먹기 좋게 된다. 이것이 오메기술이다. 이 당시 밭농사를 주로하였던 중산간 성읍마을에서는 농사일의 피로를 이 탁주로써 풀어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제주 전통 민속주인 오메기술의 제조과정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제주음식문화의 일면을 보여주게 되었다.
    (2) 성읍민속마을 고소리 술
    • 지정번호 :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1호
    • 지 정 일 : 1995년 4월 20일
    • 지정수량 : 고소리술 1식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리 673
      성읍민속마을 고소리술은 1995년 4월 20일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전승체계로는 보유자 김을정, 전수장학생 김희숙이 있다.
      고소리술 보유자인 김을정은 오메기술과 함께 이중보유자이다. 고소리술 제작과정이 오메기로 만든 탁주를 고소리에서 증류하는 단계가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이중 보유가 가능하였다. 고소리술은 이원진이 쓴 『탐라지』에도 다용소주(多用燒酒)라는 기록으로 등장한다. 그만큼 오메기술과 더불어 고소리술도 많이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주조과정으로는 오메기술을 발효시킨 술밑을 솥에 담고 솥위에 고소리를 앉힌 다음 끓여주면 고소리 옆 주둥이로 술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고소리술이다. 이 술은 알코올도수 40~45도로 증류되어 나오는 소주로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나는 게 특징이다.

 

천연기념물

  • 성읍느티나무 및 팽나무
    • 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161호
    • 지 정 일 : 1964년 1월 31일
    • 지정수량 : 느티나무 1그루,팽나무 3그루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리 881-2번지 외 3필지
      옛 정의현 도읍지였던(1423~1914) 표선면 성읍리 일관헌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와 팽나무 세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뭇과의 낙엽교목으로서 제주말로는 '굴무기낭'이라고 한다.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 또는 난형이고, 길이 2~7cm, 폭은 1~2.5cm로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측맥(側脈)은 8~14쌍이다. 목재가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답기 때문에 예로부터 건축재ㆍ가구재 등으로 흔히 쓰였다. 제주도에서는 '남방에'나 '도구리' 등의 재료로 손꼽혔다.
      팽나무는 느릅나뭇과의 낙엽교목으로서, 잎은 난형 또는 타원형이며, 길이 4~11cm로서 윗부분에 잔톱니가 있고 측맥은 3~4쌍이다. 잎자루는 길이 2~12cm이고 털이 있다. 핵과(核果)는 둥글고 지름이 7~8mm로 10월에 등황색으로 익는다. 제주어로는 '폭낭'이라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때에는 현재의 성읍리 부근에 많은 노거수가 집단적으로 자생하여 군락을 이루었다고 하나, 지금은 노목이 없고 마을 내에만 팽나무와 느티나무 노거수 몇 그루가 남아 있을 뿐이다. 민속마을로 널리 알려진 성읍리는 조선조 때 정의현의 도읍지였다. 따라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들은 일관헌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벌채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으로 본다.
      현재 일관헌의 남동쪽 길가에 남아있는 느티나무는 높이 15m, 근원부 둘레 5.6m, 가슴높이 둘레 4.1m이며 최대수관폭은 25m 정도로 뻗어 있다. 제주도내에서 현재 자생지에서 자라는 느티나무는 대경목(대경목)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수도 많지 못하며, 도내에서는 성읍리 느티나무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팽나무는 세 그루가 일관헌 내외에 있다. 일관헌 동쪽 길의 동쪽에 있는 팽나무는 높이가 17m이고, 근원부둘레 6.2m, 가슴높이 둘레 4.8m, 최대 수관폭은 23m이다. 일관헌 동쪽 울타리에 붙어서 자라는 나무는 높이가 20m로서 다른 나무들보다 높으며, 약 1m의 높이로 축대가 쌓여 있어서 원래의 크기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가슴높이 둘레는 4.4m이고, 최대수관폭은 24m이다. 일관헌 북쪽 울타리에 있는 나무는 높이가 17m이고, 근원부 둘레가 3.8m, 가슴높이둘레 3.6m, 최대 수관폭은 22m이다. 일관헌 경내에는 이외에도 가슴높이 둘레가 각각 2.1m와 2.8m되는 팽나무와 가슴높이 둘레가 2.1m인 생달나무가 자라는데, 이 팽나무와 생달나무는 송악이 감고 올라가고 있어 한층 웅장함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 성읍 조일훈 가옥
    •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68호
    • 지 정 일 : 1979년 1월 22일
    • 지정수량 : 초가 5동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정의현로 34번길 32 
      이 집은 조일훈의 할아버지가 1901년에 건립했다고 전한다. 집은 한일자형 우진각 초가집으로 안거리(안채, 20평), 밖거리(바깥채, 18평), 목거리(헛간채, 6평) 및 대문간이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안거리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3칸 형식이다. 내부 구성은 대청, 대청 왼쪽에 부엌(정지)과 작은방(작은구들)을 두었고, 오른쪽에 안방(큰구들)과 고팡을 두었다. 안방과 대청 앞으로는 반칸 툇마루를 두었다.
      문을 들어서 오른쪽 곁에 있는 밖거리는 작은방과 툇마루를 놓지 않았을 뿐 안채와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농기구와 말과 소에게 물을 먹이던 돌구유, 객줏집일 때 쓰던 돈궤를 보관하고 있어 농가와 객주로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창고가 있는 자리에는 가축을 이용해 곡식을 찧던 연자마가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개인의 집 안에 이와 같은 기구를 설치했던 예는 제주도에서는 보기 드문 일로 독농가의 특징을 한층 높이고 있다. 성읍민속마을 중심가에 있는 전형적 전통민가로 객줏집, 농가 시설 일부를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성읍 고평오 가옥
    •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69호
    • 지 정 일 : 1979년 1월 22일
    • 지정수량 : 초가 4동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정의현로 34번길 5-3 
      18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초가이다. 예전 정의고을의 주요도로였던 남문 길가에 위치해 있고 이문간(6평)이 뚜렷해서 고풍을 자아낸다. 이문간을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남향인 안거리(18평)와 북향인 밖거리(17평)가 마주하여 서 있고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 동쪽에 목거리(12평)가 서향으로 앉아 있다. 전에는 마당 서쪽에도 동쪽으로 목거리가 있어서 건물이 'ㅁ'자형으로 배치되었으나, 이 서쪽 목거리는 1970년대 중반에 훼손되었다.
      안거리 대청 마루문에는 '호령창'이라는 작은 대청 마루문이 따로 있는데, 이는 제주도 남부 일부 지방에만 유달리 전해지는 가옥형태이다. 안거리 정지에는 돌을 사각으로 둘러 만든 붙박이 화로인 '부섭'이 있었는데 1979년 보수할 당시에 훼손되었다.
      1980년에 보수한 밖거리는 면사무소가 표선리로 옮겨지던 근래까지 관원(官員)들이 숙식하던 곳으로 상방이 집 가운데 위치하지 않고 동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며, 집 뒤 툇마루가 있을 자리에는 골방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352평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지닌 이 초가는 안거리 뒤에 장독대가 있고 동백나무 등 상록수가 있는 공간과 밖거리 뒤에 우영이 있어서 조화를 이룬다. 목거리는 수레간과 남방애(통나무로 만들어진 제주 특유의 절구) 등을 보관하는 헛간과 쉐막(외양간) 따위로 쓰였다.
      이 가옥은 넓은 대지 위에 건물들의 배치가 알맞을뿐더러 '호령창', '부섭' 등 제주 고유의 시설, 관원숙소로서의 밖거리의 특수한 가옥형태, 규모 있는 이문간 등으로 보아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 성읍 이영숙 가옥
    •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70호
    • 지 정 일 : 1979년 1월 22일
    • 지정수량 : 초가 2동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서문로 4-7
      이 초가는 19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20세기 초 정의고을의 여인숙으로 쓰였던 초가로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여관(旅館)집'으로 통칭되지만, 제주도의 전형적인 초가인 안거리(17평)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자그마한 헛간채(8평)가 마주 앉은 구조이다.
      안거리는 한라산 산남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3칸 집이고, 자그만 헛간채는 예전에 멍석이나 남방애 등을 보관했던 곳이다. 안거리와 헛간채는 1980년도에 해체하여 보수를 하였다.
      정지 앞에는 물 구덕을 얹어 두는 대석(臺石)인 '물팡'이 있는데, 그 물팡을 이룬 대석이 규모를 갖추고 있어서 이 가옥 전반의 품위를 유지시켜 주고 있다. 우영에는 대나무들이 알맞게 자라고 있다.
      이 초가는 지난날 '여관집'으로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여관으로서의 특이한 가옥형태는 찾아볼 수가 없는 평범하고 단출한 전통 농가일 따름이다. 따라서 한라산 산남지역에서 소규모의 단조로운 전통 가옥형태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성읍 한봉일 가옥
    •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71호
    • 지 정 일 : 1979년 1월 22일
    • 지정수량 : 초가 3동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정의현로 34번길 22-10
      이 초가는 19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의현성의 동문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 경관이 아늑하고, 팽나무와 규모 있는 이문간이 뚜렷해서 전통적인 초가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초가의 구성은 안거리(22평)를 중심으로 밖거리(18평), 헛간과 쉐막(외양간)이 달려 있는 이문간(10평)으로 되어 있다. 안거리에는 3칸집으로 재래식 온돌인 '굴묵'으로 통하는 다른 문을 두지 않고 난간쪽을 이용하여 출입하는 제주도 산남의 가옥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3칸집인 밖거리는 상방(대청마루)을 앞뒤가 트이게 꾸미지 않고 상방 뒤쪽에 작은 구들을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안거리는 1980년에 해체 보수를 하였으나, 밖거리와 이문간은 개조된 부분이 적어서 전통적인 가옥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을뿐더러, 울타리를 둘러가며 팽나무ㆍ동백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이 가옥은 올레와 이문간이 여유 있는 공간구성을 이루고 있고, 안거리와 밖거리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울타리에 조화롭게 자란 나무들과 마당에서 내다보이는 경관이 수려하다는 점에서 전통가옥의 전형적 구조와 기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성읍 고상은 가옥
    •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72호
    • 지 정 일 : 1979년 1월 22일
    • 지정수량 : 초가 2동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정의현로 34번길 5-6
      이 초가는 고상은의 증조부가 1879년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69호인 성읍 고평오 가옥과 이웃하였다. 자그만 안거리(17평)와 "ㄱ"자로 놓인 목거리(7평)만으로 단출하게 이루어진 가옥으로 이문도 없고 우영 같은 공간도 전혀 없다. 안거리와 목거리는 1979년에 해체 보수를 하였다.
      이 자그만 가옥의 특색은 예전에 안거리 자체가 대장간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안거리는 3칸으로 대장간으로 쓰였던 당시의 가옥구조는 상방과 작은 구들 및 정지간의 구별 없이 통칸으로 이루어졌다. 대장간 한가운데에는 땅에 기둥뿌리를 묻는 생깃기둥(상기둥)을 세우고 경사진 대들보를 얹었던 원초적인 가옥형태로 보인다.
      대장간은 어느 마을에서든 그 마을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 가옥도 객사에서 남문으로 이르는 길가에 세워졌다. 이문과 우영 같은 공간도 없이 단출하게 지어진 이 가옥은 민가로서의 학술적 가치보다는 대장간으로 쓰였던 유다른 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 성읍민속마을
    •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188호
    • 지 정 일 : 1984년 6월 7일
    • 지정수량 : 민속마을 일원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정의현로 55
      우리나라의 민속마을 중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5개소이다. 성읍민속마을,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 월성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9호), 고성 왕곡마을(중요민속자료 제235호), 아산 외암마을(중요민속자료 제236호)이다. 성읍민속마을을 제외한 나머지 민속마을은 한 집안의 집성촌이 전승되어 민속마을을 이룬 반면 정의고을, 곧 성읍민속마을은 산촌이면서도 조선조 초 약 500년 동안 정의현의 도읍지였다는 특이성을 가진다.
      제주도는 조선조 1416년, 안무사(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에 따라 약 500년 동안 삼분(三分)하여 통치했다.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대체로 지금의 제주시를 제주목으로 하고, 한라산 남쪽을 둘로 나누어 서쪽은 대정현, 동쪽은 정의현으로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당초 정의현의 도읍지는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古城里)였다. 그러나 고성리는 그 위치가 정의현의 동쪽에 치우쳐서 행정적ㆍ군사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1423년에 도읍지를 성읍리로 옮겼다.
      성읍민속마을은 해안마을 표선리에서 산간으로 8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오름들이 마을을 빙 둘러가며 불쑥불쑥 솟아 병풍처럼 둘러싼 속에 있는 아늑한 산촌이다. 마을 뒤에는 영주산(325m)이 있고, 백약이오름ㆍ본지오름ㆍ무찌오름ㆍ장자오름ㆍ갑서니오름ㆍ설오름ㆍ개오름ㆍ모구리오름ㆍ독자봉(독자봉)ㆍ가시오름 등 숱한 오름들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안에는 천연기념물 제161호인 느티나무와 팽나무 그리고 제주도 유형문화재인 정의향교, 일관헌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또한 민속마을은 둘레 2986척, 높이 13척으로 축조된 정의현성으로 감싸여 있다. 돌하르방 12기와 무속신앙처인 신당이 20여 개소가 있었는데, 이중 '안할망당'ㆍ'광주부인당'ㆍ'일ㅤ궤당'ㆍ'개당' 등 중요한 신당은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일관헌 동쪽에 인접하여 주민의 신수와 건강을 관장한다는 '안할망당'은 관청과 신당이 인접한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부인병이나 모유 등을 관장한다는 '광주부인당'과 마소의 질병과 양육 등을 관장하는 '쉐당'이 있었음은 유별난 일이다.
      마을에서는 유식부락제(儒式部落祭)인 포제(浦祭)가 행해지고 있다. 그 제향(祭享)은 여느 마을과 비슷하지만 제향대상신(祭享對象神) 가운데 '목동신지위(牧童神之位)'가 들어 있는 것이 유다른데 농업과 더불어 축산업이 주민들의 주된 생업이라는 한 증거이다.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 제95호인 제주민요가 전승되고 있다. 산촌임과 더불어 500년간의 도읍지라는 이중성격을 띠는 이 마을은 민요 또한 양면성을 띠고 있다. 곧 제주도의 어느 마을에서나 전해지는 민요와 성읍마을에서만 전승되는 민요가 접목되었다.
  • 돌하르방
    • 지정번호 : 제주도 민속자료 2-22호 ~ 2-33호
    • 지 정 일 : 1971년 8월 26일
    • 지정수량 : 돌하르방 12기
    • 소 재 지 : 표선면 성읍리
      돌하르방은 우석목·무석목·벅수머리 등으로 불리는 석상으로 제주성, 정의성, 대정성의 입구에 세워졌던 것이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돌할아버지'의 제주어로서 1971년 제주도문화재위원회에서 문화재 명칭으로 채택한 것이다. 현재 제주도에는 45기의 돌하르방이 있다. 제주시내 21기, 성읍12기, 대정12기 등이 남아 있고, 제주성에 있던 2기는 경북궁과 한국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석상의 형태는 벙기지형 모자,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 큼지막한 주먹코, 꼭다문 입술, 두 손은 배위 아래로 위엄 있게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돌하르방의 크기는 제주시의 것이 가장 커서 평균 신장 181.6cm, 성읍리의 것이 141.4cm, 대정에 있는 것이 136.2cm인데, 제주시에 소재한 것이 가장 위용 있는 반면에, 대정에 있는 것은 가장 해학적이고 예술성이 짙게 조각되었다.
      돌하르방의 주요 기능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수호신적 기능이다. 돌하르방이 3현의 입구에 쌍쌍이 마주하여서 있음으로써 현내의 융성과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수호신적 기능을 한다. 둘째, 주술종교적 기능으로 마을에 있는 방사탑과 축사의 기능이다. 난리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든가, 나쁜 병을 예방할 수 있다든가, 애를 못 낳는 여인이 돌하르방의 코를 밤에 몰래 쪼아서 먹으면 잉태할 수 있다든가 하는 것이다. 셋째, 돌하르방은 성문 앞에 세워짐으로써 도읍지의 위치를 분명히 알려준다. 성 바깥 사람들은 성 안으로 함부로 들어오는 일을 삼가도록 했었으므로 위치표식과 더불어 금표로서의 기능을 지녔음이 드러난다. 이처럼 돌하르방의 주요기능은 육지부의 장승의 기능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하르방이 제작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담수계에서 펴낸 『탐라지』에는 1754년에 김몽규 목사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표선면 성읍민속마을에 있는 돌하르방 12기도 제주도 민속자료 2-22호에서 2-33호까지 지정되었다.
  • 송종선 가옥
    • 지정번호 : 제주도 민속자료 3-46호
    • 지 정 일 : 1978년 11월 14일
    • 지정수량 : 초가 1동
    • 소 재 지 : 표선면 하천리
      올레는 목거리 옆으로 이어져 있다. 당초에는 안거리, 밖거리, 목거리가 있는 세거리 집이었으나, 지금은 안거리만 남아 있다. 목거리는 콘크리트 건물로 개조되어 원래의 내부 구성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안거리는 호령창이 달린 상방 좌우로 전면에 큰 구들과 작은 구들이 있다. 구들의 뒤칸은 고팡이 있다. 우영에는 대나무와 감귤나무 몇 그루가 있다. 전통가옥의 외벽은 잡석으로 허튼층 쌓기를 하는 것이 일반인데 반하여 이 초가의 전면 외벽은 두께가 고르게 잔다듬한 장태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하였다. 윗돌을 재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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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면>주민자치과>주민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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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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