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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표선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동남부, 서귀포시 동부지역에 위치한 관광, 교통, 문화, 상업의 중심지인 우리 표선면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옛 정의현의 500여년간 도읍지였던 성읍민속마을! 도내에서 가장 넓은 표선백사장! 옛 조상들의 생활상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제주민속촌박물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시리 유채꽃길 등 청정 관광자원! 전통문화와 관광, 그리고 1차산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1만2천여 면민들이 소박한 꿈을 가꾸어 가는 지역입니다.
모든 분들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민원인에게 친절하고 신속하며 공정·정확하게 민원 처리를 하겠습니다.

 

표선리

표선리는 표선면사무소 소재지로, 매오름 동쪽, 달산봉 남쪽 해안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표선리는 600여년 전에 속칭 ‘웃말캐미’ 일대에 사람이 들어와 살고, 그 후 ‘안가름’과 ‘뒷가름’ 일대에도 사람이 들어오고, ‘한못’ 일대에도 박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표선리의 옛 이름은 ‘페선르 > 표선르’ 또는 ‘페선이르’인데, 이는 한자 차용 표기로 쓰였다. 『탐라도』와 『탐라순력도』(「한라장촉」) 등에는 ‘페선르을〔標立村〕’, 「탐라지도」에는 ‘페선르을〔票先村〕’, 「제주삼읍도총지도」에는 ‘페선르을〔票先旨村〕’,『호구총수』(정의, 토산면)와 「제주삼읍전도」, 「정의군지도」 등에는 ‘페선을〔表善里〕’,『제주읍지』(정의현지, 방리, 중면)에는 ‘페선르을〔表先里〕’, 『정의읍지』와 『제주군읍지』(「제주지도」) 등에는 ‘좌페선을〔左善里〕, 페선을〔表善里〕, 일제강점기 5만분의 1 지도에는 ’페선이을〔表善里〕‘ 등으로 표기하였다. 민간에서는 ‘페선이 > 표선이’라고 한다. 標立村(표립촌)과 票先村(표선촌), 表善里ㆍ表先里(표선리) 등은 ‘페선을’의 한자 차용 표기로, ‘페선르을’의 ‘르’〔旨〕가 표기에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票先旨村(표선지촌)은 ‘페선르을’의 한자차용표기이다. 18세기 후반부터 표선리(表善里)로 표기되었고, 19세기 후반에 한때 좌선리(左善里)와 표선리(表善里)로 분리되었다. 좌선리는 20세기 초반에 영남리(永南里)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정의군 동중면 영남리(永南里)와 표선리(表善里), 그리고 좌면 하천리(下川里)의 일부를 통합하여 제주군 동중면 표선리(表善里)라 하였다. 2005년 12월 현재 표선리는 동상동, 중하동, 서상동, 서하동, 당포, 한지동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동상동(東上洞)은 동동네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연유하였다. 중상동(中上洞)은 중간 위쪽에 있는 동네라는 데서 연유하였다. 서상동(西上洞)은 섯동네 위쪽에 있는 동네라는 데서 연유하였다. 서하동(西下洞)은 섯동네 아래쪽에 있는 동네라는 데서 연유하였다. 당포(堂浦)는 포구 가까이에 있는 ‘당캐’라는 당이 있는데서 유래하였다. 한지동(漢池洞)은 ‘한못’ 일대의 동네로, 서하동 서쪽에 있다. ‘매오름’ 서남쪽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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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리

하천리는 표선리 북동쪽 해안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해안마을로, 동쪽의 천미천(川尾川)을 사이에 두고 성산읍 신천리와 접하고 있다. 하천리는 500여 년 전 ‘묵은가름’ 일대에 위씨가 들어와 살고, 그 후 오씨와 강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하천리의 옛 이름은 ‘내깍’ 또는 ‘알내깍’이라 했는데, 지금 민간에서는 ‘내끼’ 또는 ‘알내끼’라고 한다. 『중종실록』(5년 9월 기사)과 「탐라도」, 『탐라순력도』(「한라장촉」) 등에서 ‘내깍개〔川尾浦〕’를 확인할 수 있다. 마을 이름은 1709년의 「탐라지도」와 18세기 중반의 「제주삼읍도총지도」등에서 ‘내깍을(川尾村)’로 표기되고, 18세기 후반의 『호구총수』(정의, 촌읍면)와 『제주읍지』(정의현지, 방리, 좌면) 등에서 ‘알내깍을〔下川尾里〕’로 표기되었다. 19세기의 「제주삼읍전도」와 「정의군지도」, 『정의읍지』(「정의지도」)와 『제주군읍지』(「제주지도」) 등에 ‘알내깍을〔下川里〕’로 표기하였다. ‘내깍개’는 한자차용표기로 川尾浦(천미포)로 쓰는데, ‘내깍내(川尾川)’ 하류에 있는 포구를 이른다. 그 포구 일대에 형성된 마을은 ‘내깍’ 또는 ‘내깍을’이라 했다. 이를 한자차용표기로 쓴 것이 천미촌(川尾村)이다. ‘내깍을’은 다시 ‘웃내깍’과 ‘알내깍’으로 나뉘었는데, ‘알내깍을’은 下川尾里(하천미리)로 썼다. 하천미리(下川尾里)는 나중에 하천리(下川里)로 써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정의군 좌면 下川里(하천리)와 新楓里(신풍리)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제주군 동중면 下川里(하천리)라 하였다. 이후 하천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 12월 현재 하천리는 상동, 중동, 하동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상동은 윗동네, 중동은 중동네를 이른다. 하동은 川尾浦(천미포: 내깍개)가 있는 해안 일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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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리 : 성읍1리, 성읍2리

성읍리는 정의현성이 있었던 중심마을로, 영주산 남쪽, 남산봉 서쪽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을 이른다. 성읍리는 적어도 700~800여 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성읍리 일대의 유물산포지에서 확인되는 신석기시대의 적갈색토기 등을 고려하면 그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초에 성산읍 고성리에 있던 정의현성을 옮겨오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성읍리의 옛 이름은 ‘ 진사을(진사리)’이었는데, 정의현성이 들어서면서 城邑(성읍)이라 하였다. 『태종실록』(17년 5월 갑진)에서 ‘ 眞舍(진사)’, 『세종실록』(18년 4월 임술)에서 ‘晉舍里(진사리: 진사ᄆᆞ을)’을 확인할 수 있다. 「탐라도」에서 ‘旌義縣(정의현), 邑外村(읍외촌), 弓山村(궁산촌: 활미을)’,『탐라순력도』에서 ‘旌義(정의), 邑外村(읍외촌: 읍밧을), 弓山村(궁산촌: 활미을)’을 확인할 수 있다. 眞舍里ㆍ晉舍里(진사리)는 ‘진사을’의 한자차용표기이다. 眞舍ㆍ晉舍(진사)는 ‘진사’의 음가자 결합 표기인데, ‘진사’의 뜻은 확실하지 않다. 정의현성이 옮겨오기 전 이름이다. 정의현은 정의현성을 일컫고, 읍외촌은 ‘읍밖을’의 차자 표기로 현성 밖에 형성된 마을을 이른다. 이 읍외촌은 18세기 중후반부터 城邑里(성읍리)라 하였다. 성읍은 조선시대 때 州(주)ㆍ府(부)ㆍ郡(군)ㆍ縣(현) 등을 두루 이르던 말인데, 정의현성이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붙인 것이다. 지금의 성읍1리를 이른다. 정의현성 북서쪽에 형성된 마을을 ‘활미을’이라 하고, 한자차용표기로는 ‘弓山村(궁산촌: 활미을) 또는 弓山里(궁산리: 활미을)’라 했다. 지금의 성읍2리를 이른다. 1914년 정의군 좌면 城邑里(성읍리) 일부를 제주군 동중면 성읍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정읫골’ 또는 ‘성읍’ 일대를 성읍1리라 하고, 옛 ‘활미을’ 일대를 성읍2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 12월 현재 성읍1리는 오늘날은 서상동, 서하동, 동상동, 동하동 등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마을을 크게 동ㆍ서로 나누고, 다시 위와 아래로 나눈 것이다. 성읍2리는 1950년대 이후에 옛 ‘구렁팟’ 일대를 성읍2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 12월 현재 성읍2리는 ‘구룡동’과 ‘안보동’ 등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활미’ 서쪽(영주산 서북쪽) ‘구렁팟’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이곳을 九龍洞(구룡동)이라 하였다.

‘구렁팟’은 ‘구렁이 진 밭’이란 뜻이다. 구룡은 ‘구렁’의 음가자 표기에 불과하다. ‘구렁팟’ 북쪽에 遮南洞(차남동: 차남동네)이 있었다. ’남‘은 ’상수리나무‘의 제주도 방언이다. ’활미‘ 동쪽에 ’안밧‘, ’안보둥‘ 일대에 마을이 있었는데, 한자로 安保洞(안보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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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가시리는 가시오름(오늘날 지도에는 가세오름으로 표기됨) 북쪽, 설오름 남쪽, 갑선이오름 서쪽에 형성되어 있는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 가마천(加麻川), 마을 서쪽으로 안좌천(安坐川)이 흐른다. 가시리는 700여 년 전에 ‘안좌름’ ‘와개우영’ 일대에 변씨가 들어오고, 600여 년 전에 지금의 가시리에 한씨가, 450여 년 전에 군위 오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그 후 순흥 안씨, 신천 강씨 등이 들어왔다. 가시리의 옛 이름은 ‘가시오름을’이다. ‘가시오름’ 북쪽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가시리 일대에서 확인되는 첫 마을은 17세기 말 「탐라도」에 보이는 橡岳村(상악촌)과 安坐村(안좌촌)이다. 그 후 18세기 중반의 「제주삼읍도총지도」에서 橡岳村(상악촌)과 安坐岳村(안좌악촌: 안좌오름을)이 확인되고, 18세기 말의 『호구총수』(정의, 토산면)와 『제주읍지』(정의현지, 방리, 중면)에서 加時岳里(가시악리: 가시오름을)와 安坐岳里(안좌악리: 안좌오름을)를 확인할 수 있다. 상악촌은 지금 민간에서 확인하기 어려운데, ‘남오름마을’의 한자차용표기로 보이고, 지금 가시리의 전신으로 보인다. 상악촌은 18세기 후반에 가시악리로 표기되고, 19세기부터 加時里(가시리)로 표기되었다. 19세기 말에는 가시리가 둘로 나뉘어 동가시악리(동가시오름을), 서가시악리(서가시오름을)라 하였다. 전자를 東加時里(동가시리: 동가시오름을) > 東加里(동가리)라 하고, 西加時里(서가시리: 서가시리을)  西加里(서가리)라 하였다. 서가시리는 20세기 초반에 가시리라 하고, 1905년 이후에 동가시리를 통합하여 가시리라 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安坐村(안좌촌)은 安坐岳(안좌악: 屛花岳이라고도 함) 아래에 형성되었던 마을을 이른다. 安坐岳村(안좌악촌: 안좌오름을)과 安坐岳里(안좌악리: 안좌오름을)로 표기되었다가 18세기에는 安坐里(안좌리: 안좌오름을)로 표기되었다. 안좌리는 1914년 이후에 일부는 가시리에, 일부는 수망리에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오늘날도 ‘안좌동’은 가시리의 한 자연마을로 남아있다. 2005년 12월 현재 가시리는 중동, 안좌동, 두리동, 폭남동, 동상동, 역지동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중동은 가시리 중심마을이다. 안좌동은 ‘안좌오름’(병칭 ‘벵곶오름’) 앞에 형성되어 있는 자연마을을 이른다. 옛 ‘안좌오름을’ 일대에 형성된 동네다. 두리동은 ‘두이동’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서쪽에 있는 ‘두리물’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자연마을이다. 동상동은 윗동네 동쪽 동네를 이른다. 폭남동은 중동 남쪽 ‘폭남’(팽나무)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자연마을이다. 역지동은 가시리 동남쪽 ‘역르’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자연마을로, ‘영지동’이라고도 한다. 역지동은 일제강점기 때 ‘靈旨洞(영지동: 영르동네)’으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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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리 : 세화1리, 세화2리, 세화3리

세화리는 매오름 서남쪽 일대, 토산악(토산봉) 동쪽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세화리의 옛 이름은 ‘곶’[는곶]이다. 이를 한자차용표기로 쓴 것이 細花村(세화촌)과 細花里(세화리)이다. ‘곶’은 ‘가늘게 형성된 숲’이라는 뜻을 가진 고유어다. 이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세화촌은 17세기 말 지도인 「탐라도」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다. 세화리는 18세기 말의 『호구총수』(정의, 토산면)와 『제주읍지』(정의현지, 방리, 중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화촌과 세화리는 18세기 중반에 한때 敦內岳村(돈내악촌: 도내오름을)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세화리의 별칭인 ‘도노름’을 한자차용표기로 나타낸 것이다. 세화리는 19세기 후반에 두 개로 나뉘는데, 東細花里(동세화리) 東細里(동세리)와 西細花里(서세화리) 西細里(서세리)이다. 이 두 마을은 20세기 초반에 다시 세화리로 통합된다. 지금의 세화1리와 세화3리 일대를 이른다. 19세기 말에 加麻路浦(가마로포: 가마롯개)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 마을을 可麻洞(가마동: 가마로동네) 또는 加麻洞(가마동)이라 했다. 지금의 세화2리를 이른다. 세화리는 1950년대 초부터 옛 ‘곶’ 또는 ‘도노름’, ‘강애왓’ 일대를 세화1리, 옛 ‘바마롯개’(가마롯개: 오늘날 ‘가마리’) 일대를 세화2리라 하였으나, 1988년부터 세화1리에 속했던 ‘강애왓’(오늘날 강화동) 일대를 세화3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 1월 현재 세화1리는 서상동, 동상동, 동하동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세화2리는 본동과 중동 등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에서는 상동과 하동, 서동 등으로 나뉜다. 세화3리는 19세기 말에 군위 오씨, 동해 정씨, 편안 강씨 등이 ‘무렴벵듸’ 일대에 들어오고, 그 후 ‘동강와’와 ‘불미저’ 일대에 군위 오씨, 경주 김씨, 김해 김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세화3리의 옛 이름은 ‘강애왓’이다. 일제강점기의 5만분의 1 지도에는 ‘江河洞(강하동: 강애왓)’으로 표기하였는데, 달리 江華洞(강화동), 江花洞(강화동) 등으로도 표기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의 江河洞(강하동)으로, 4ㆍ3사건 뒤에는 江下洞(강하동)으로 쓰다가 1960년 이후 江華洞(강화동)으로 썼다고 한다. 한편 주민들은 大華洞(대화동)이라는 이름도 썼다고 한다. 1988년 이후에 이 일대를 세화3리라 하여 세화1리에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 12월 현재 江華洞(강화동) 1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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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산리 : 토산1리, 토산2리

토산리는 토산봉 서쪽, 가시오름 서쪽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중산간 마을로, 표선면의 가장 서쪽 마을이다. 서쪽은 남원읍 신흥리와 접하고 있다. 고려시대 屬縣(속현)의 하나였고, 조선 후기 때는 兎山面(토산면)이라고도 했다. 『태종실록』(태종16년 5월 정유)에서 兎山縣(토산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고려시대의 속현 이름 중 하나이다. 14~15세기에 동도천호소(東道千戶所, 1404년 이전), 동도정해진(東道靜海鎭, 1404년 이후)에 소속되어 兎山縣(토산현)이라 부른 적이 있었다. 그 이후 ‘토산을’〔兎山村ㆍ兎山里〕이라 하였다. 토산은 원래 토산리 가까이에 있는 오름 이름인데, 이 오름 가까이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兎山村(토산촌) 또는 兎山里(토산리)라 했다. 표기상 土山里ㆍ吐山里(토산리: 토산마을)로도 표기되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兎山里(토산리)로 표기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兎山里(토산리)를 北兎山(북토산)과 月旨洞(월지동: ᄐᆞᆯᄆᆞ르동네), 南兎山(남토산)과 廣浦(광포: 넙은개) 등으로 나누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정의군 동중면 兎山里(토산리)의 일부(일부는 신흥리에 포함됨)를 제주군 동중면 兎山里(토산리)라 하였다. 1940년대 말부터 행정상 토산1리와 토산2리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토산1리는 1000여 년 전에 제주 부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후 광산 김씨, 경주 김씨 등이 들어오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토산1리의 옛 이름은 ‘북토산’ 또는 ‘웃토산’, 또는 ‘절려가름’이다. 1940년대 말부터 ‘웃토산’과 속칭 ‘절려가름’, ‘ᄐᆞᆯᄆᆞ르’와 속칭 ‘물ᄀᆞᆷ는밧’ 일대를 행정상 토산1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려가름’의 ‘절려’의 뜻은 확실하지 않고, ‘가름’은 ‘가르다’의 명사형으로, 원래 ‘길이 두세 갈래로 갈린 곳’의 뜻인데 제주도에서는 점차 갈림길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뜻하는 말로 변하였다. 2005년 12월 현재 본동과 월지동 등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본동은 토산리의 중심마을로, 가름동네라고도 한다. 월지동은 가시오름 서남쪽 속칭 ‘ᄐᆞᆯᄆᆞ르 ’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로, 한자차용표기로 月旨洞(월지동)이라 하였다. 토산2리는 토산악 남쪽 바닷가, 신흥리 동쪽 바닷가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해안 마을이다. 토산2리는 300여 년 전에 순흥 안씨, 광산 김씨가 알토산 일대에 들어오고, 그 후 경주 김씨가 물ᄀᆞᆷ는밧 일대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토산2리의 옛 이름은 ‘남토산’ 또는 ‘알토산’이다. 일제강점기 때의 5만분의 1 지도에 ‘南兎山(남토산: 알토산), 廣浦(광포: 넙은개)’라고 하였다. 南兎山(남토산)은 ‘남토산’ 또는 ‘알토산’의 음독자 결합 표기로, 남쪽(아래쪽)에 있는 토산이라는 뜻이다. 아래쪽(‘토산개’ 주변)에 있는 토산이라는 데서 ‘알토산’이라고도 한다. 廣浦(광포)는 ‘넙은 개’의 한자차용표기이다. 廣은 ‘넓은’의 제주도방언 ‘넙은’의 훈독자 표기, 浦는 ‘개’의 훈독자 표기이다. ‘넙은개’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넙은개을’〔廣浦洞〕이라고 하였다. 1940년대 말부터 ‘토산개’ 주변의 ‘알토산’과 ‘넙은개’, ‘당머리’ 일대를 행정상 토산2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 12월 현재 토산2리는 본동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본동은 바닷가의 ‘당머리’일대에 있는 자연마을로, ‘넓은개’ 동네와 새동네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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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면>주민자치과>주민자치
담당자
오승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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